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31년 화교배척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1927년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난 후에도 많은 [[화교]]가 중화민국으로 귀환하지는 않은 듯하다. 1928년 화교 수가 이전보다 현격히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4] [[1927년 화교배척폭동]] 이후 일본 당국은 중국인 입국을 더욱 강하게 단속했다. 1931년, 대규모 폭동과 학살이 일어나기 전인 1931년 6월 '상해시보'에서 총독부으로 적극으로 벌이는 화교구축정책과 학교 박해 사례를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 보도에선 인천, 조치원, 개성 같은 각지의 사례를 거론했다. 비자나 거주허가증이 없는 노동자는 불시로 체포와 강제출국하며 허가증 심사를 강화하고 불법체류자에게 벌금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일이다. 이 법령은 1910년대에 이미 제정했으나 유명무실했던 것은 일본 당국이 엄격하게 시행한 것이다. 허가증 심사나 체포와 검색 과정에서 일어난 힐문과 인격적 모욕이 공분의 대상이 됐다. 무역과 상업 활동이 위축되고 1927년에 폭동이 일어났으나 화교 노동자 입국은 오히려 급증했고 조선인 노동자 실업 문제가 조선의 신문 지상에 보도됐다. 화교 노동자 단속 강화는 곧 화교 노동자가 들어오는 것과 그에 따른 노동시장에서 민족갈등이 높아진다는 것을 반증했다. 1930년에 화교인구는 6만을 넘어 7만에 가까워졌다. [*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2~113] 그리고 [[만주사변]] 전해인 1930년 [[일본 제국]]에서의 중국인 거류는 일본에 3만명, 조선에 7만명, 대만에 5만명으로 조선이 가장 많았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 1929년 3월 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 따르면 음력 5월이 끝날 무렵이며 인천부두는 중국에서 온 노동자 무리에 파묻히고 그 수가 많으면 선박마다 한번에 1천 2~3백에 달한다고 보도하면서 상륙하는 중국 노동자의 사진을 실었다. 1929년 3월 28일 조선매일신문(朝鮮每日新聞)에서 중국 노동자 무리가 인천에 조수와 같이 밀려든다고 하며 3월 한 달 동안 인천에 상륙한 중국인 9,233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1929년 4월 1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중국인 노동자가 최근 급증해서 1,2월에는 약 3천명이 평균인데 3월에는 약 1만 명이나 되고 4월에는 더욱 늘어나 선박마다 7백~2천여 명에 가까운 중국인이 건너와서 당시까지 1만 수천 명이 들어왔다고 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45] 1931년 5월~6월엔 경기도 일대에서 화교 노동자와 화교 농민 문제가 크게 떠올랐다. 인천(仁川), 철원(鐵原) 등지에서 경찰관서는 화교노동자와 화교농민에게 거주허가증을 발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속을 강화해서 구금, 벌금, 강제출국 조치했다. 경성의 중국총영사관은 이 사건을 "중화금공피압사건(中華禁工被壓事件)"이라고 부르며 조선총독부 외사과에 강하게 항의하였다. 경기도에서 문제가 된 건 고향에서 계절성 노동자를 고용해서 채소 농장을 대규모로 경영하는 산동 화교가 많았기 때문인데 예로 산동성 출신 강문환(姜文煥)에 따르면 노동 노동자로 고용한 산동성 화교노동자 7명에게 취로허가증 발급을 요청하면서 전해인 1930년 말 귀국 시 '수원경찰서에 허가증을 반납하면 봄에 입국할 때 돌려준다'고 해 놓고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중국인 노동자 단속은 1910년부터 명문화됐지만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엄격하게 규정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1931년에는 일본과 조선 모두 [[대공황]] 때문에 경기가 나빠져서 일자리가 줄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강문환이 그렇듯 재한 화교들은 상점이든 농장이든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중국에서 동향인을 데려와 썼다.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선 조선인이 일할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화교의 이런 닫힌 동향주의는 달갑지가 않았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3]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게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